삭제되었습니다.
  • Home
  • 말씀과 찬양
  • 원로목사 설교

원로목사 설교

수요 예배

창세기11 / 셋에서 노아까지의 족보

2008-12-06 황정길 목사

mp3 다운

내용

11. 셋에서 노아까지의 족보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5-26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 5:1-8


 


아벨이 죽고 난 후 하나님이 아담에게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셋이란 이름은 ‘지정된 자’ 또는 ‘씨’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셋의 후손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셔서 이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며 이 후손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실 것을 계획하고 계신 깊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겸손히 고백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2:8)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창 26:25)라는 말씀을 보아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며,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공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생활화 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 비로소 에노스 때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자신을 의지하고 성을 쌓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며 인간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경건한 셋의 후손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하는 예배의 삶을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가 셋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경건한 자손의 계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아담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셋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그러므로 하나님-아담-셋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1:27과 창세기 5:3 사이에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는 말씀으로 미루어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조금은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거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9-10).


 


창세기 5장에서 아담 이후 노아까지의 족보가 나오면서 ‘살고 죽었더라’는 말로 한 사람의 생애가 기록됩니다. 결국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종말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하신 말씀대로 모든 인류는 어김없이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인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사람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은 사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그 시대에 알리는 산 증거였습니다. 즉 보이는 이 세상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저 세상 즉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에녹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승천사건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떻게 살았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데려감을 받았을까요? 그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에녹의 삶에 변화가 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을 때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 합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므두셀라라는 말은 ‘창을 던지는 자’ 또는 ‘죽으면 터진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므두셀라가 죽고 홍수가 났습니다.


즉 므두셀라가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이 일백팔십이 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창 7:11-12). 즉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홍수가 났습니다.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고 죽었는데 아들인 라멕을 일백팔십칠 세에 낳았고, 라멕이 일백팔십이 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때의 므두셀라의 나이는 삼백육십구 세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그해 이월 십칠 일에 홍수가 났으므로 므두셀라는 나이가 구백육십구 세가 됩니다.


 


그렇다면 홍수가 이 땅에 나기 이미 천년 전에 하나님이 경건한 에녹에게 계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이미 믿음의 눈으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것까지 예언했습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14-15).


이와 같이 하나님이 에녹에게 주님의 재림까지 계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부터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실 때도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동행이란 ‘함께 걷다’라는 뜻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동행을 하려면 마음과 뜻이 맞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면 자신의 뜻과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5-6).


에녹은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경건한 삶이라 하면 수도원에나 들어가고 성직자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에녹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神前, Coram Deo)’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른 믿음은 반드시 진실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삶속으로 들어와 영원을 살고 있습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신전의식(神前意識)’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창 5:1~8

  • 구원론
  • 로마서6:1-7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3 /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 창 9:8~17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2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창 6:1~8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1 / 셋에서 노아까지의 족보
  • 창 5:1~8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0 /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 4:25~26
  • 황정길 목사
  • 창세기09 /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창 3:14~15,21
  • 황정길 목사
  • 창세기07 / 죄의 기원과 죄 아래 있는 인간
  • 창 3:1~7
  • 황정길 목사
  •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
  • 고후5:14-15
  • 황정길 목사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모압 언약
  • 신29:1,9-13
  • 황정길 목사
  •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신8:1-3
  • 황정길 목사
  •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 신7:6-11
  • 황정길 목사
  •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라
  • 신6:16-19
  • 황정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