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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예배

창세기10 /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008-11-29 황정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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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0.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5-26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을 당한 후 그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그 이름을 가인이라 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뱀에게 저주하실 때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듣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창 3:20).


하와라는 이름은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이로 보건대 아담은 하나님이 하와를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 에덴을 회복하여 주실 것을 소망하고 있던 중에 아들을 낳자 가인 곧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후일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인간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속죄하여야 될 만큼 무섭고 큰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을 아벨이라 합니다. 이름의 뜻은 ‘허무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벨의 죽음을 예견하고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벨은 허무하게 형의 손에 살해되어 죽습니다. 그러나 여기 ‘허무하다’라는 뜻은 에덴에서 추방당하여 이 땅위에서의 삶이 ‘허무하다’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의 삶은 그가 아무리 외형은 화려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허무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양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3-7).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생 제사인 피의 제사를 드리고, 가인은 피의 제사가 아닌 인간의 노력의 산물인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자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그 행위가 의로워 믿음으로 드렸기에 그 제물이 받아들여졌고, 가인은 하나님께 그 행위가 악하여 믿음으로 드리지 아니하므로 그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이상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근거가 제물 자체가 아니고 제물을 드리는 자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과 삶이 드려지는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가인은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자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형제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죄의 결과는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시기와 분노와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간관계는 동반자관계에서 경쟁관계로, 사랑의 관계에서 미움과 증오의 관계로, 협력의 관계에서 시기와 질투의 관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며 성을 쌓고 살게 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 4:16-17).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점점 멀어져 갈뿐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쌓고 그 속에 거하는 동굴 속의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이상하게도 범죄한 인간의 역사는 이때부터 하나님을 등지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 4:16).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창 11:2).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창 13:11).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함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와 성령의 역사는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갔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6-10).


그러므로 사도행전 1:8의 ‘땅 끝까지’는 예루살렘 동편인 요르단·시리아·이란·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 문화권으로 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 복음이 전하여지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운동이 일어나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5-26).


 


즉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인류에게 복음이 서쪽으로 진행하여 세상을 한 바퀴 돌아 전파되면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에덴이 회복되고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1-5).


하나님의 앞을 떠나간 가인의 후예들의 불경건한 자손들의 족보가 창세기 4:16-24까지 기록되어있고 경건한 셋의 자손의 족보가 창세기 4:25-5:32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위하여 모세가 기록한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인류에게 들어온 후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투쟁이 이제 시작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 백성의 뿌리가 누구이며, 사람의 본분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언약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곧 우리의 뿌리와 근원이 어디인 것을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는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 세상 나라를 이 땅에 세우게 됩니다. 그 첫째 증거가 결혼제도를 무너뜨렸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창 4:19)라는 말씀을 보아 하나님이 세우신 일부일처(一夫一妻)의 가정 제도를 무너뜨렸습니다. 그 둘째 증거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사람 죽인 것을 자랑으로 삼는 타락한 세상으로 변하여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노스’란 이름은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생’이란 뜻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질그릇 같이 연약한 인생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생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자신이 오늘 밤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자기의 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생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참되게 믿게 됩니다.

창 4:25~26

  • 구원론
  • 로마서6:1-7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3 /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 창 9:8~17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2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창 6:1~8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1 / 셋에서 노아까지의 족보
  • 창 5:1~8
  • 황정길 목사
  • 창세기10 /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 4:25~26
  • 황정길 목사
  • 창세기09 /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창 3:14~15,21
  • 황정길 목사
  • 창세기07 / 죄의 기원과 죄 아래 있는 인간
  • 창 3:1~7
  • 황정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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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후5: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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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정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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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8:1-3
  • 황정길 목사
  •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 신7:6-11
  • 황정길 목사
  •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라
  • 신6:16-19
  • 황정길 목사